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에게 영화는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지적 허영과 시각적 쾌감을 얻는 좋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우리 생활과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고, 심오하다. 좀 더 깊이 알고 싶었다. 감독의 시선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 나오는 영화를 모두 보고, 하나씩 곱씹는다면?
매번 상상만 했다. 1001이라는 숫자는 꽤나 비현실적이니까. 해볼까 하다가도, "어느 세월에 다 보지?"라는 의문이 마음에 턱 하니 무겁게 걸린다.
"어느 세월엔가 다 보겠지" 고민에 대한 대답은 역시 명쾌했다.
그래서 시작한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보기 프로젝트.
감독: Robert Wiene
촬영: William Hameister
미술: Hermann Warm, Walter Reimann, Walter Röhrig
각본: Carl Mayer, Hans Janowitz
독일 북부의 산골 마을 홀스텐발(Holstenwall)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자신을 칼리가리 박사라 칭하는 한 남자가 축제에 참여해 '23년간 잠을 자고 있는 몽유병자이자 예언자' 세자르(Cesare)를 보여주며 관람객을 끌어모은다.
마침 현장에 있던 주인공 프랜시스(Francis)와 그의 친구 알란(Alan)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알란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죠?"라는 다소 위험한 질문을 한다.
그러자 세자르가 대답한다. "당신은 새벽녘에 죽게 될 거야."
그리고 알란은 새벽녘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친구 알란을 죽인 범인으로 칼리가리 박사를 의심하는 프랜시스. 창문 너머로 박사와 세자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몰래 지켜본다. 하지만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분명 박사와 세자르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는데.
당황한 프랜시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인간 내면에 집중한 독일 표현주의]
표현주의의 도래는 당시 독일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독일 사회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도시화, 산업화에 따라 인간성이 피폐해졌고, 전쟁의 공포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계는 눈 앞의 현실(인상)이 아닌 인간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왜곡된 선과 형태, 강렬한 색채는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주관적 시야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비참한 현실 속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결코 정형화된 기법으로 표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시류는 영화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화 제작자들은 인간 내면의 감정을 다양한 상징 및 기법으로 표현했다. 기하학적이고 회화적인 무대장치, 과장된 연기, 화자의 심리 상태에 따른 다양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영화의 메인 무대인 홀스텐발 마을의 전경.
한눈에 봐도 기괴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참고로 해당 마을 전경은 캔버스에 그려 넣어 표현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보자.
건물이 아니라 촉수처럼 뻗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에 있는 느낌이다. 건물 위에 붙어 있는 창문 또한 이리저리 뒤틀려 있어 마치 괴수의 내장 한가운데 있는 것 같다.
영화 속 모든 장면의 촬영은 사전에 제작된 스튜디오 내에서만 진행되었다.
이처럼 표현주의 영화는 제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에 맞게 철저히 세트가 조작, 통제된다.
현실의 정형화된 것들로는 내면의 억압된 감정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무대 장치와 더불어 메이크업 또한 눈여겨볼 볼거리다.
특히 몽유병자 세자르의 허여멀건 얼굴 위로 덧대어진 과장된 눈 화장과 입술 화장은 사악한 기운을 극대화시킨다.
무성 영화는 지루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일단 예전의 것이고,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 한 쉽게 접하기도 어렵다.(적고 보니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느낌이?)
처음엔 지루했다. 보자마자 "아닛, 이런 명작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 끝을 달리고 있을 때에도 볼만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본격적인 음미는 영화에 대해 공부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영화 속 연출의 뼈대가 되는 예술사적 배경과 깨알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게 하였고, 새로운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꼬인 실타래를 천천히 한 올씩 풀어내고, 그 사이에 숨은 별사탕을 집어먹는 느낌이었다. '왜',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관통해 아직까지 명작으로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구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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