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 이질적으로 놓여진 피아노 한 대, 그리고 정숙해 보이는 여인과 그녀의 아이.
이 포스터 한 장으로 짐작해보자. 영화는 어떤 이야기일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영화의 제목은 왜 '피아노' 일까?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에이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고상한 귀족 가문의 영애인 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버지 사이에서 난 딸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일면식조차 없는 저 먼 뉴질랜드 땅의 개척자에게 시집을 보내버린다.
그녀가 골칫거리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
여기서부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귀족 가문의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항상 고상하고 우아한, 무엇보다도 절개를 제 목숨같이 여기는 사람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외간 남자 사이에서 난 딸아이가 있다. 게다가 그녀, 말을 못한다. 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녀는 먼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데리고 뉴질랜드에 도착한다. 딸아이 그리고 피아노 한 대.
투박하고 추잡스러운 뱃사람들 사이에서 고상하게 차려입고 몸을 꼿꼿이 세우는 그녀.
굳은 날씨에 남편과 짐꾼들도 도착하려면 오래 걸릴테니 육지로 다시 가자는 선장의 말에 저런 냄새나는 배에 두번다시 오르기 싫다고 당돌하게 받아치는 그녀.
점점 고상한 귀족 아가씨에 대한 이미지가 금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해변에서 그녀의 딸아이 그리고 피아노와 함께 야영을 한다.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뉴질랜드 개척민이다. 그래서 넓고 황량한 뉴질랜드 땅으로 도착한 에이다.
넓은 해변에서 고상한 복장을 한 채 서 있는 에이다의 모습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즉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에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햇빛을 받지 않은 창백한 피부, 코르셋 안에 꽉 조여진 가녀린 육체, 질척대는 진흙으로 가득한 미개척지를 걷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고상한 복장.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인 '숙녀'의 모습인 에이다를 날 것 그 자체인 뉴질랜드 땅에 데려다 놓음으로써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 했던 것일까?
나는 '남성 중심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뉴질랜드라는 거친 땅에 비유함으로써 그것에 저항하고자 했던 에이다의 몸짓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 같다.
그녀의 도발적인 행동은 뉴질랜드 땅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다. 남편과 짐꾼들이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자신과 함께 육지로 돌아가 내일 다시 돌아오자는 선장(남성)의 제안에 저런 냄새나는 배에는 다신 돌아가지 않는다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뱉는 에이다의 모습은 현대 여성들의 당당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크리놀린(새장 모양의 틀)으로 임시 거처를 만들어 딸아이와 함께 해변에서 밤을 보내는 모습은 누군가(남성)의 도움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헤쳐나가는 그녀의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자세가 두드러지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당시 시대상을 역행하는 행동들을 뉴질랜드라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행해지게 함으로써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는 전형적인 '젠틀맨'이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외형부터 행동까지 에이다의 모든 것들이 낯설다. 영화 초반 해변에서 스튜어트가 에이다를 처음 본 순간, 그의 표정은 실망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한 마디 "그녀는 왜소해"
아마 그는 좀 더 살집이 있고 키가 큰 여성을 부인으로 맞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건강한 여성을. 그리고 에이다는 그런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영화 속 그의 언행은 다소 강압적이다. 부드러운 어투로 부탁하는 듯 얘기를 하지만 어쨌든 결론은 그의 말을 따라라는 것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이기적인 남성이지만 가정에서 여성들은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서 가장인 남편의 의사가 곧 본인의 의사요 운명인 당시의 시대상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그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 그에게 에이다의 행동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그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극 초반 해변에 놔두고 온 피아노를 대신해 탁자에 건반을 새겨 두드리는 에이다를 보며 이모님에게 에이다가 혹시 뇌에 이상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며 심각하게 상담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에이다에게 피아노가 어떤 의미인지, 왜 에이다가 그토록 피아노를 치고 싶고 가지고 오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과거에 여성이 주체적으로 무엇을 원하거나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 없이 남자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순종적인 여성을 보고 자라온 당시의 전형적인 남성상을 대표하는 스튜어트는 영화 내내 에이다와 갈등을 빚는다.
스튜어트의 동료 베인스는 꽤 흥미로운 인물이다. 일단 그의 첫인상부터가 심상치 않다. 그는 마오리족처럼 얼굴에 문신을 했다. 그렇다고 베인스가 마오리족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처럼 문신을 했다. 처음엔 마오리족에게 동화된, 그들처럼 거칠고 자유로운 영혼의 인물인 줄 알았지만, 그 너머 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문신한다는 것 자체가 현시대에서도 '저항과 아웃사이더'의 의미가 짙다. 그렇다면 지극히 보수적이었던 당시 옷으로 감출 수 있는 다른 부위가 아닌 항상 노출되는 얼굴에 문신했다는 것은 '사회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한 아웃사이더' 의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스튜어트와 같은 남성상에 철저히 반하는 그의 외모와 행동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베인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누구나 동일한 인간으로 대하는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성격을 극 초반 해변에서 스튜어트가 에이다가 어때 보이냐는 질문에, "피곤해 보이는군."이라는 아주 짧은 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에이다가 피아노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며 항상 그녀의 감정을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런 그의 행동들은 영화 중반과 후반에 걸친 피아노 레슨 장면에서 잘 나타나며 레슨이 계속될수록 한 꺼풀씩 벗겨지는 그녀의 옷가지들처럼 그녀의 마음을 열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그녀에게 가르쳐 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자신의 원하는 사람을 만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는 것. 베인스는 에이다가 주체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승의 역할을 한다. 에이다는 베인스를 만남으로써 완전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연애물이지만 남녀 주인공들의 행동은 21세기 남녀들의 행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당시 결혼에 대한 것은 지극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선택해주거나 자신을 선택해준 남성과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가정의 천사로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여성들의 숙명이었다. 영화 초반 에이다가 뉴질랜드 개척민에게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팔려가는 장면에서 당시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즉 이 당시 여성들에게는 '결혼'만 있었지 그 전 단계인 '연애'란 있을 수 없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연애란 '상호간의 동의'로 이루어지는 로맨틱한 관계인데 자신의 의견이 존재할 수 없는 당시 여성들에게는 엄청난 사치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하지만 영화 속 에이다는 이 '연애'라는 것을 한다. 베인스와 함께. 베인스가 피아노를 미끼로 (다소 일방적으로)그녀를 취하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반항하며 '검은 건반에 하나씩'이라는 그녀에게 유리한 조건을 유도한다. 그리고 베인스에게 쉽사리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듯 공연에서 스튜어트의 손을 잡으며 보란듯이 베인스를 도발한다. 영화 중반부에 가서 그들은 결국 서로의 몸을 탐하게 되지만 이 또한 '상호 동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에이다를 취한 후 죄책감에 피아노를 돌려주며 더이상 만나지 말자는 베인스의 말에 그의 뺨을 때리며 애정 싸움을 하는 장면 또한 에이다의 진취적 연애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에이다와 베인스 사이의 모든 일들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의견이 아니라 상호간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현 시대에는 당연한 남녀 상열지사를 빅토리아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씌움으로서 명확한 대비가 일어났다. 감독은 당시의 남성들보다도 더 격렬하게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는 에이다의 모습을 통해 '정상의 비정상화'를 비꼼과 동시에 여성을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려는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감독의 의도는 성애장면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베인스와의 거래를 통해 결과적으로 그에게서 피아노를 얻었음에도 에이다는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 불만족스런 표정이다. 그녀의 남편 스튜어트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온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하지만 그녀는 플로라에게 연주를 시킨 채 밖을 멤돌기만 한다. 그리고 집안에서 평화롭게 피아노를 연주하다가도 애틋한 눈초리로 뒤편을 바라본다. 원래 베인스가 있어야 하는 자리인 뒤편에는 더이상 그가 없다. 그 순간 그녀는 느꼈던 것 같다. 피아노는 더이상 그녀의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피아노는 더이상 그녀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새로운 소통 방식은 '베인스와의 사랑'으로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베인스와의 밀회를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는 에이다의 몸짓과 표정은 절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침내 이루어진 사랑에 대한 기쁨일까, 아니면 자신의 행동에 뒤따를 일에 대한 두려움일까. 나는 그녀의 눈빛 속에 담겨진 메시지가 궁금해졌다.
그들의 성애장면은 기존 할리우드에서 생산되는 수 많은 성애 장면들과 비교하여 남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 영화들의 성애 장면은 단순히 섹스 그 자체에 집중하여 '남녀간의 사랑의 정점', '욕구의 분출'의 의미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화 피아노 속의 성애장면은 에이다가 피아노라는 특정 도구에 의지하지 않은채 자기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인생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던 에이다의 의지를 폭발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베인스와의 행위를 통해 그녀는 마침내 자의식이 존재하는 나로써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피아노 속의 성애장면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베인스와의 밀회를 통해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확신을 얻은 에이다. 하지만 그들의 밀회는 스튜어트에게 들통난다. 그들의 관계를 의심한 스튜어트가 몰래 그들의 밀회를 옅보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왜 스튜어트는 베인스와 에이다의 밀회를 그저 바라보며 분노하기만 했을까? 왜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 그들을 벌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튜어트는 전형적인 영국신사이면서 권위적인 인물이다. 분노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그는 이성으로 차갑게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며 신사답게 행동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스튜어트는 그만의 방식으로 에이다를 회유하려 한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가는 모든 통로에 판자를 박아서 에이다를 집 안에 가두어 버린다. 다시는 베인스를 만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는 에이다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만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요구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에이다는 다소 너그러운 스튜어트의 품성을 이용하여 밤마다 그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을 준다. 베인스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하지만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 곧 떠나는 베인스를 붙잡기 위해 피아노 건반 하나를 떼어 사랑의 메시지를 새겨 넣고 플로라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플로라는 무엇이 두려웠는지 스튜어트에게 가서 사실을 털어놓고, 스튜어트는 연극 속의 푸른 수염과 같은 광폭한 사내로 돌변하여 에이다의 한쪽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왜 하필 다른 곳도 아닌 손가락을 잘랐을까? 아마 손가락이 에이다가 잃게 되었을 때 가장 상처가 큰 부위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피아노를 치난 사람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하나가 매우 소중하다. 피아노로 소통하는 에이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손가락인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에이다가 피아노에서 해방되어 당당한 한 여성으로 우뚝 선 후였다. 그렇기 때문에 손가락을 잘리는 에이다의 표정 또한 담담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을 자른다면 그녀가 더이상 반항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스튜어트. 하지만 에이다는 이미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확신이 있다. 베인스를 사랑하고 그를 따라 가겠다는 것. 그녀의 간절한 메시지를 들은 스튜어트는 결국 베인스와 에이다를 보내준다.
떠나는 날 아침, 마침내 그녀의 바램이 이루어 졌음에도 에이다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떠나는 배 안에서도 그녀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플로라에게 말한다. 피아노를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라고. 베인스는 순간 당황하지만 에이다의 고집에 결국 피아노를 바다 속으로 던지고, 에이다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밧줄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넣고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한다. 하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수면 위로 올라온다.
나는 이 장면이 강렬한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피아노를 던져 버리려는 에이다의 행동에서 나는 더이상 피아노라는 특정한 툴(Tool)로서 자신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한사람으로서 당당히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다속으로 잠기는 피아노를 바라보며 에이다는 순간 일말의 후회를 했던 것 같다. "과연 내가 피아노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내가 내 의지대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다양한 의문들과 두려움이 일순간 그녀를 덮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유약해진 그녀는 밧줄 사이로 자신의 발을 넣어 자살을 선택하지만 바닷 속에 피아노와 함께 내려가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의문 투성이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신발을 벗고 밧줄에서 탈출한 후 수면 위로 올라온다. '죽음', '기회', '놀라움'. 에이다는 피아노와 함께 예전의 자기 자신을 버리고 수면 위로 새로운 모습으로 올라왔다. 놀랍도록 강렬한 삶의 의지와 함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말한다.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에이다의 강렬한 의지는 영화 후반 부에 들어 막 시작되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이 말은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여성인 에이다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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